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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갈하게 포장된 멜로를 만나보기란 매우 어렵다. 혹시 필자가 다양성을 상실한 한국 영화계의 문제를 다시 지적하는 건 아닌가 하며 짜증 내지 않길 바란다. 한국 영화계뿐만이 아니라 헐리우드, 일본, 중국을 통틀어서 앞서 말한 수준의 멜로를 만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5년이다. 근 5년 간 필자가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는 <호우시절>이지만, <호우시절>은 본래 옴니버스의 한 에피소드로 만들어지던 것을 장편영화로 늘린 경우이기 때문에 서사의 깊이가 다소 부족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건축학개론>은 오랜만에 만난 제대로 된 멜로영화라 말할 수 있다. 깔끔하고 정갈하게 잘 포장되어 있고, '첫 사랑'이란 주제가 가져다줄 분위기를 거의 완벽하게 영상화했다. 극의 매력과 화면의 아름다움, 배우들의 매력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었고, 필자는 그 아름다움에 눈물을 흘렸다.
 


 '개론'이란 '시작'을 말한다. 건축학을 빼고 '개론'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개론은 정말 멋있게 쓰인 축약본이다. 그래서 어떤 학과든 '개론'을 통해 학습을 시작하도록 되어 있고, 학생들은 '개론'을 통해 자신이 배워야 할 것에 대한 환상을 품는다. 그렇게 자리잡힌 공부의 시작은 나중에 돌이켜보면 참 아련하고 아름답다. 깊숙이 들어올수록 자신이 하는 공부가 생각과 다르게 치열하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개론'을 살펴볼 때의 감정은 설렘 그 자체였다.

 첫 사랑도 마찬가지다. 성숙한 머리로 처음 만난 사랑이 가슴에 남긴 풍광은 참 아름다웠다. <건축학개론>에 등장한 제주도 풍광처럼 시원함과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풋풋함과 어리숙함으로 손발이 오글거릴 것 같던 여러 에피소드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리고 그 당시엔 분명히 행복했다. 꿈같이 허무했던 이별마저도 행복으로 기억되는 게 첫 사랑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살면 살수록, 사랑을 하면 할수록 첫 사랑의 느낌을 찾을 수 없게 되더라. '사랑'과 '삶'이라는 존재가 점점 무게감을 더해가면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첫 사랑 같은 사랑'을 원하고 또 원한다. <건축학개론>에서 15년 전과 15년 후의 교차 편집은 그 우스꽝스러운 사랑을 원하는 것 같다. 있을 수 없지만, 누구나 꿈꾸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아름다운 것은 그 꿈을 '무참하지 않게' 짓밟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랑의 시작을 말하는 게 아니라 담담하게 현실을 걷는 두 주인공의 모습이 자신과 완벽하게 겹쳐지기 때문이다. 아프지 않게 가련히 짓밟히는 첫 사랑의 기억에 자연스럽게 공감해야 했다. '공감했다'가 아니라 '공감해야 했다.'다. 

 
 

 자연스러운 교차 편집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던 <건축학개론>은 정갈하게 잘 정리된 느낌을 끝까지 유지한다. 환한 햇살에 비친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과 긴 시간이 흘러 현실에 녹아든 옛 연인의 현실이 멋진 교차편집으로 마주 앉는다. 그리고 그들의 발걸음은 변함없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하지만 필자는 영화 속 서연(배수지, 한가인 분)과 승민(이제훈, 엄태웅 분)은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같은 하늘 아래에 사는 지 의문일 정도로 다시 보기 어려운 첫 사랑과 만나고, 결국 첫 사랑의 추억인 '건축학'이 완성된 형태로 제주도에 남아 있다. 그들은 그 집이 있는 한 아련한 추억만이라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인 스토리 속에 소소하게 녹아있는 판타지다. 

 이 영화는 굉장히 영리하다. 삐삐시대의 다양한 추억거리를 가져다가 코미디 요소로 만들어 놓은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억지스럽고 지저분한 코미디가 들어갔다면, 이 영화의 가치는 폭락했으리라. 또한, 첫 사랑을 하던 15년 전 두 사람의 이미지와 현재의 두 사람의 이미지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 역시도 영리하다. 첫 사랑은 첫 사랑으로 남아 있어야 아름답다는 사실을 감상자의 가슴에 남겨놓기 때문이다. 추억과 현실의 간극을 적절히 잘 전달하면서 영화는 아프지 않게 감상자의 추억을 끄집어내 비벼댄다. 
 

 
 <건축학개론>은 정말 5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멋진 멜로 영화다. 영화가 가지는 요소들이 모두 조화롭다. 이전에 우려를 표한 적이 있는 한가인의 연기는 (
한가인, '건축학개론'의 걸림돌 되나) 역시나 매우 실망스러웠지만, 오히려 그 실망감이 현실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것 같아 매력요소가 되었다. 말끔하고 단단해 보이는 이제훈과 거칠고 피곤해 보이는 엄태웅의 간극도 아주 마음에 들었고, 청순한 매력의 배수지가 도도한 도시 미인 한가인으로 변하는 모습 역시 '추억'과 '현실'의 간극을 말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이 영화는 딱히 눈물을 쥐어짜는 영화가 아니다. 필자의 글을 보고, 너무 현실적이라 아픈 영화가 아닐까 할 수 있지만 (솔직히 아주 틀린 예상은 아니다만) 의도적으로 아프게 하는 영화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감상자의 가슴에서 살짝 들춰낸 첫 사랑의 추억을 가볍게 비틀어 흐뭇하고 웃고, 살며시 울 수 있게 하는 (아주 잘 만든) 멜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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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ovie JY 2012.03.25 10:41 신고

    이 영환 봄날에 연인들끼리 달콤하게 즐길만한 멜로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솔로끼리 오히려 과거의 추억을 달콤쌉싸름하게 곱씹으면서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되죠 역시. ㅋ
    추억에 잠겨, 기억의 습작을 하면서요. :)

  3. BlogIcon 나루세 2012.03.25 11:41 신고

    너무도 영화에 대해 정확하게 공감이 가도록 써주셨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이 글에 속시원히 끄집어져 나온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암튼 이번 영화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습니다. 당장 쥐어짜는 감동은 없을지라도 담백한 여운이 꽤 오래갈듯 싶습니다.

  4. BlogIcon 메리앤 2012.03.25 12:22 신고

    삐삐세대... 제대로 된 멜로영화...
    이 글을 보니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가 됩니다.
    즐거운 일요일 되세요~. ^^

  5. BlogIcon 코기맘 2012.03.25 13:24 신고

    이영화 리뷰 정말 기다렸네요..
    보고싶어져용.ㅇ.ㅎㅎㅎ
    봄에어울리는영화네요 ㅎㅎㅎ

  6. BlogIcon 커피쟁이 2012.03.25 15:55 신고

    요고 무지 땡기는 영화네요 ㅎㅎㅎ

  7. BlogIcon 캡틴거북 2012.03.25 17:25 신고

    이미 결혼한지도 좀 되고 애도 있고 하니까 첫사랑이라는 것이 가물가물하기만 한데, 이 영화가 그런 묻혀진 기억과 감정들을 아프지 않게 잘 끌어내 주더군요. 주위의 흐느끼는 여성분들의 효과음도 영화의 일부인 듯 했어요. 즈라더님도 효과음 좀 내셨나 봅니다? ㅋㅋ

  8. BlogIcon 카부터 2012.03.25 18:52 신고

    첫사랑 없는 사람 서럽게 만드는 작품이더군요.

  9. BlogIcon 클릭 2012.03.25 19:07 신고

    틀에박힌 멜로와 순정영화의 뻔한 공식을 배제하고
    첫사랑을 풋풋하면서도 참 안타깝고 슬프게 묘사한게 좋았습니다.

  10. 손님 2012.03.25 21:36 신고

    멜로물인가요
    제목보고 다른 장르인 줄 알았는데 말이죠

    호우시절 급이라면 꼭 보고싶은데....

    역시 한가인씨의 연기는 영 아닌가보군요

  11. 스프옹 2012.03.25 21:45 신고

    제 주변에 본 사람들은 전부 계속 생각난다고 하네요ㅋㅋ
    저도 후유증에 못 벗어나고있는중이고요ㅎㅎ

  12. BlogIcon 학마 2012.03.25 22:59 신고

    건축학개론, 화차 두개를 놓고 고민하다 화차를 봤었는데, ㅎㅎ
    화차도 재미있게 봤었는데, 감주님 포스팅을 보니 건축학개론도 확~ 땡기네요..다음주에 고고싱~

  13. BlogIcon Temu 2012.03.26 00:20 신고

    이걸 보면 되곘군요 ㅋ

  14. BlogIcon 이야기캐는광부 2012.03.26 01:06 신고

    평이 좋아서 꼭 보고싶더군요. 봄에 딱 어울리는 멜로네요. 영화보고 나면 괜시리 첫사랑이 생각날 것 같네요.ㅎㅎ

    • BlogIcon 즈라더 2012.03.26 01:17 신고

      상큼한 기분을 안고 나올만한 영화는 아닙니다만,
      참 어울리긴 합니다. 잊고 살았던 첫사랑이 떠오를만한..

  15. BlogIcon 썬도그 2012.03.26 01:24 신고

    절대 공감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몇번 울었어요. 제 이야기와 너무 흡사해서요. 모르겠습니다. 왜 저와 승민이 동일인물이라고 생각되던지 아무튼 저의 경험의 강물을 이 영화가 터트러버렸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고 필력이 대단하시네요. 다시 한번 느낍니다.

  16. BlogIcon 산다는건 2012.03.26 08:08 신고

    나름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호우시절 이후 처음 본 멜로 영화였는데 재밌었어 엄청 다행이었습니다.

  17. BlogIcon 사과랑 2012.03.26 16:06 신고

    즈라더님 말대로 영리한 영화 같아요. 중간 줄타기도 잘 한 것 같고

  18. BlogIcon 뮤라드 2012.03.27 17:05 신고

    잘 보고 갑니다.. ^^

  19. BlogIcon 환유 2012.04.04 10:50 신고

    저도 간만에 만난 멜로영화 중엔 건축학개론이 깔끔하면서도 임팩트있었던 것 같아요! 기대만큼 해주었던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20. BlogIcon 빛이여 2012.04.04 13:22 신고

    평도 괜찮아서 함 봤더니...
    풋풋했던 첫사랑이야기.. 재미있었습니다.ㅎ
    트랙백해도 괜찮죠?^^;ㅎ

  21. 평범남 2013.10.29 05:47 신고

    이렇게 오래 지난 글에 댓글을 달게 되네요. 외국 가는 비행기에서 보고 참 많이 울었지요. 나이가 먹어가면서 어느덧 기억 저편으로 보냈던 어린 날들의 추억과 지금은 앞만 보고 뛰어야하는 내 현실에...
    한 순간이나마 제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네요.
    제 나이 또래 남자들은 정말 다 같이 공감 할수 있는 영화입니다.
    40대 남자들한테 강추 입니다.

    • BlogIcon 즈라더 2013.10.29 20:54 신고

      억지로 눈물을 강요하지도 않고, 신파 분위기가 끼어 있는 영화도 아니건만 이렇게 슬픈 영화가 또 있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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