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카지노 로얄>로 본드 무비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지만, <퀀텀 오브 솔러스>로 다시 폭삭 주저앉았다. <카지노 로얄>이 본드 무비 팬과 대중 양측을 모두 만족하게 했던 것과 다르게 <퀀텀 오브 솔러스>는 양쪽을 모두 실망하게 했고, 특히 본드 무비 팬들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다. 심지어 '추악하고 공포스러운 본드 무비' 라는 평가까지 봤으니 얼마나 실망했는지 알 법하다. 아마 이런 반응들이 바바라 브로콜리를 비롯한 본드 무비의 제작자들을 많이 당황하게 했던 모양이다.

 <스카이 폴>은 그런 제작자들의 고뇌가 듬뿍 담겨 있는 영화다. 그리고 그들의 과감한 결단이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옥토퍼시>를 오마쥬한 추격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카지노 로얄>이나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보여준 추격 장면의 느낌과 유사하다. 격렬한 추격 장면이 이어지다 끝날 것 같을 때 다시 시작되는 추격. 리부팅 이후 본드 무비의 전형적 구성이랄까. 그리고 <스카이 폴>은 이런 새로운 액션 스타일을 시원하게 끝내버린다. 본드가 총을 맞고 추락하는 순간은 새로운 본드 무비의 스타일도 깨끗하게 잊어 달라는 권유나 다름이 없다. 실제로 이 오프닝 액션이 끝나고 <스카이 폴>에서 그런 추격 장면은 다시 나오지 않는다. 즉, <스카이 폴>이 리셋한 것은 구시대 본드 뿐 아니라 2006년 <카지노 로얄>로 시작된 새로운 본드까지 포함한다.

 '구식 퇴물'로 파악되던 본드가 되돌아오지만, 온전히 되돌아온 게 아니다. 그가 정말 되돌아오는 순간은 청문회에서 M의 대사가 교차 편집 가운데 흘러나올 때이다. 그 대사는 <퀀텀 오브 솔러스>가 만든 주된 적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제임스 본드는 절대 끝나지 않는다'는 다짐을 동시에 담고 있다. 청문회 장면으로 완벽하게 돌아온 본드는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국장에게도 인정받아 완벽한 부활을 꿈꾼다. 그리고 그 부활을 위해서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본드가 긴 시간 사용해온 (최신 무기의 탈을 쓴) 고전적 무기들을 시원하게 박살 내고, 본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별장도 박살 내면서 이제 다 끝났노라고 외친다. 정말 중요한 핵심만 남기고 모조리 리셋하겠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과거에 얽매이는 것 역시 여기서 끝이라고 주장하는 느낌도 든다. 전작들보다 액션의 규모가 작아졌다는 점, 드라마 연출로 긴장감을 조성한 여러 액션 장면은 기존 본드 무비와 차별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홍콩, 마카오 장면뿐만 아니라 오프닝 추격 장면도 그랬다. 오프닝 추격 장면은 단순히 액션으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버려진 요원들의 모습을 예고처럼 비추면서 '강화된 드라마'를 배경으로 삼았다. 영화의 오프닝은 <옥토퍼시>의 노골적인 오마쥬인데, 오리지널보다 몇 배는 세밀한 연출과 드라마를 갖췄다는 점 역시 차별화된다. 오마쥬는 오마쥬일 뿐 그 이상이 되기 어려웠던 다니엘 크레이그의 기존 본드 무비와 다르게 오마쥬를 넘어선 장면을 만들고자 한 <스카이 폴>이 이상적으로 보이는 건 합리적이다.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실바가 영화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이 실바 캐릭터와 관련된 내러티브가 다소 덜컹거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그의 동선은 분명히 <다크나이트>를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다. 이건 실바가 '악당'이기 이전에 '의미 없이 충성하는 의문의 거대 조직을 거느리고, 말이 지나치게 많아서 자멸하고 마는 구시대 본드 무비(혹은 블록버스터)의 악당'을 상징하는 캐릭터기 때문으로 보인다. 뭔가를 상징하는 캐릭터는 본래 극의 내러티브를 말아먹게 되어 있다.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테러에 가까운 사회적 현상을 상징하느라 내러티브에 문제를 일으켰던 것과 같다. 

 마지막에 긴 시간 본드 무비의 역사를 상징하던 애스턴 마틴과 같은 것을 깔끔하게 부수는 모습을 보면 분명히 이 영화가 말하는 바가 확실해진다. (애스턴 마틴이 부서지는 순간 본드의 격렬한 분노는 코믹하면서 묘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더는 얽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주 매력적이라 지금의 어린 관객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본드 무비의 유산만 남긴 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나머지는 과감히 폐기함으로써 더 많은 대중을 스크린 앞으로 불러 모으겠다는 의지다. 본드 무비의 모든 유산을 담아주길 바라는 본드 무비 팬들을 모두 만족하게 하느라 작품의 재미까지 망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드 무비를 이끌어가겠다며 선언해버린 영화가 <스카이 폴>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태도를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본 시리즈의 격투 디자인을 훔쳤다는 오해를 받았던 <카지노 로얄>과 <퀀텀 오브 솔러스>와 비교해 격투 장면의 개념이 달랐다는 점도 그렇고, 본드 걸의 역할에 너무 얽매이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간 본드 무비에서 본드 걸은 '억지로' 영화의 중요 역할을 맡아 극을 망칠 때가 잦았기 때문이다. 글쓴이에게 (눈 요기와 별개로) 제 구실을 한 본드 걸은 에바 그린의 베스퍼 린드 하나뿐이었다. 물론, <스카이 폴>의 본드 걸이 기존 시리즈와 달랐던 것은 M을 여자 주인공으로 내세운데다 새로운 머니페니와 Q를 설정하느라 어쩔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스카이 폴>은 지나치게 긴 시간 축적되어 이젠 굳어버린 유산 가운데 쓸모 있는 것을 빼고 전부 파괴해버리는 영화다. 영화에서 청문회가 열리는 이유를 떠올려보자. 이제 제임스 본드와 같이 구시대적 요원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열렸다.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때려주고 제임스 본드가 진짜 필요한 세상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적어도 세상이 변한 것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변한 세상처럼 본드 무비도 변해야 한다고 의견을 밝히는 것이다. 지난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본드 무비 팬들에게 비판받았던 것 중 하나가 '퀀텀'이란 조직 자체였는데, 이제 '퀀텀'과 같이 무국적, 무사상 조직이 본드 무비의 적이 되어야 당연한 게 아닐까? 

 이 영화에는 <인터내셔널>의 터키 장면과 미술관 장면을 거의 그대로 쫓은 장면이 있으므로 왜 <인터내셔널>의 이미지를 쫓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터내셔널>의 악당은 한계가 명확하고 그 자리를 누군가 대신 차지할 수도 있는 '무형'과 '어둠'을 무기로 삼는 국제적 악당이다. 국적도 없고, 사상도 없으며 원칙조차도 모호한 이들. 돈 하나로 묶여버리는 세계적 권력자들의 초현실적인 악행. 그리고 그런 것들이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서도 진짜 악惡이다. 본드 무비 역시 이제 그런 존재를 상대로 싸우는 영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 아닐까? 아니, 그래야 마땅하다.

 

 여기까지 적은 것은 모두 글쓴이 개인의 생각이며, 제작진의 생각과 100%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많은 사람이 한 번쯤 생각해 볼 법한 의견이라 여기고 있다. 여러분도 <스카이 폴>을 보면서 본드 무비에 대해 재정리를 해보길 바란다. 그리고 본드 무비 팬에겐 마음의 준비 역시 필요하지 않을는지. <카지노 로얄>의 리부팅과는 개념이 아예 다른 <스카이 폴>의 리셋에 대해서 말이다.


조금 더 적어보기

- 본드 걸로 나온 베레니스 말로히는 뜻밖의 매력을 선보였다. 캐스팅 정보와 사진만 봤을 때 개인적 기준에서 역대 최악의 본드 걸이 되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하필 왜 <스카이 폴>의 본드 걸로 나왔을까 하면서 슬퍼했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차가운 모델의 표정 안에 묘한 백치미가 숨어 있어서 보호 본능이 절로 들더라.

- MI6 건물은 <언리미티드>에서도 수난을 겪은 적이 있다. 

- <스카이 폴>의 오프닝 크레딧은 007 시리즈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영상미를 선보인다. 개인적으로 <밀레니엄>의 오프닝 크레딧보다 더 멋졌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2012.11.13 07:57

    비밀댓글입니다

  2. 베리알 2012.11.13 08:06 신고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긴 해도, 흥행 상황을 보면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카지노 로얄 - QOS의 본드가 아주 마음에 들었던 저로선, 이 리셋으로 인해 그 본드가 사라지는 게 안타까웠지 말입니다.

    스카이폴을 보고 와서 QOS를 다시 또 봤는데... 역시 제 취향은 그쪽인 것 같습니다. ^^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예술적인 오프닝 크레딧 때문에 블루레이를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할 것 같은데...
    어디서 스카이폴 오프닝 크레딧이 포함된 블루레이 샘플러 하나 떨어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

    • BlogIcon 즈라더 2012.11.13 16:25 신고

      저도 카지노로얄-QOS 연작이 참 좋았습니다.
      <스카이폴>로 아예 리부팅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그쪽 때문이지 구시대 본드에 대한 추억 때문은 아니라능..

      오프닝 크레딧은 정말 블루레이로 봐야 하지 말입니다. +_+

  3. BlogIcon 붉은비 2012.11.13 10:14 신고

    1. 아델... 쩔더군요... ㄷㄷㄷ 이렇게나 매력적인 보이스라고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었는데 말이죠.
    2. 스카이폴은 다 맘에 드는데 크레이그의 쩍벌남 포즈가 수시로 나오는 건 참 거슬리더군요.-_-;
    3. [셜록]의 컴버배치가 차기(그래봐야 다음 다음 다음 작품이지만) 007 오퍼를 받았다는군요. 개인적으로는 적극 찬성입니다.

    • BlogIcon 즈라더 2012.11.13 16:27 신고

      그래도 다니엘 크레이그가 아니었다면 그 쩍벌남 포즈도...
      엉성했겠죠. 기존 본드들은 다 몸매가 별로였기 때문에..
      육중한 근육과 기럭지로 만든 그 라인은...ㅋㅋㅋ

  4. BlogIcon 나비오 2012.11.13 10:55 신고

    이상하게도 어렸을 때는(?) 007을 좋아라 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누가 뭐래도 흥미가 가질 않는 이유가 뭘까요 ^^?
    정말 궁금 ..

  5. BlogIcon 릿찡 2012.11.13 11:54 신고

    이는 테세우스의 배와 같은 문재입니다.
    아테네에 전시된 테세우스가 탄 배. 하지만 썩은 목재를 새 목재로 교체하고, 교체하고 하다가 원래 목재가 완전 없어져 버렸어도 그 배는 테세우스의 배인 겁니다. 테세우스의 배의 정체성은 테세우스를 기념하려는 아테네인들의 의지이니까요.

    그러고보니 디시코믹스도 얼마전 리부트를 했지요 ^^

    • BlogIcon 즈라더 2012.11.13 16:28 신고

      좋은 예네요. 그런데 만약, 그 배의 여러 구조가 바뀌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007 팬들이 주장하는 게
      구조가 바뀌어버린 007을 007이라 부를 수 이느냐는 거라서요.

  6. BlogIcon 사과랑 2012.11.13 13:51 신고

    이번 영화의 오프닝은 정말 멋지죠. 아마도 아델 덕분이 아닌가하네요.ㅋㅋ 007영화 치곤 이렇게 장문의 리뷰가 나오기 힘든데 이번 영화는 대체적으로 모든 분들이 길게 쓰시더군요.ㅎㅎ

    • BlogIcon 즈라더 2012.11.13 16:29 신고

      아무래도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리뷰하지 않으려다가 한 번 더 보게 되었고, 007 팬들의
      충격적인 글들을 보고 울컥해서 리뷰한 거라능..

    • BlogIcon 사과랑 2012.11.14 09:45 신고

      충격적인 글들이요? 어떤 글들이었는지 궁금하군요.
      제가 의도한건 아니지만 제가 본 건 대체적으로 칭찬일색이었던지라...^^
      대체 어떤 글이었길래 울컥하게 만든건지.ㅎㅎ

    • BlogIcon 즈라더 2012.11.14 14:21 신고

      뭐.. 다니엘 크레이그는 본드로 불릴 자격이 없다느니...

  7. 나당 2012.11.13 15:27 신고

    이웃나라의 모 로맨스 영화와 비슷한 제목이라 그런지
    작품에 대한 애정이 물씬 느껴지는 내용이네요 ^^

    1)「'퀀텀'과 같이 무국적, 무사상 조직이 본드 무비의 적」
    청문회 장면에서 M은 어떠한 거대 조직보다 두려운
    (쉽게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에) '개인'의 존재에 대해 언급했었죠(!)

    2) 다른 악당들이 다 하는 정도만 말을 하셨지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페이스(거물!)를 갖고 계신다는 게
    바르뎀 형님의 비극이지요(;;)

    • BlogIcon 즈라더 2012.11.13 16:30 신고

      M의 대사는 유치했지만 명확히 본드 무비의 길을 제시했다고 봐야죠.
      국적과 목적이 명확한 적이라면 컴퓨터 기술과 같은 것으로
      첩보 활동을 대체할 수 있겠지만, 퀀텀과 같은 존재를 컴퓨터
      기술로 잡는 게 가능할 리 없으니..

  8. 무비 jY 2012.11.13 16:57 신고

    글 읽으면서 그 감흥의 전율이 다시 돋는군요 ~
    더 이상 얽매이지않겠다..라는 그 새로운 의미만으로도 참 의미있는 50주년 새로운 시작의 영화 <스카이 폴>.

  9. BlogIcon Arti 2012.11.13 17:44 신고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도 여기서 끝일가요??? 크레이그도 007 하기 싫다던데......새로운 M이 등장하고, 미스 머니페니도 등장하고, 새로운 007 시리즈를 기대해봅니다.

  10. 손님 2012.11.13 20:42 신고

    평가가 다들 극과 극 수준이이더군요
    좋으면 좋지만 싫으면 악몽같은....

    앞으로도 꾸준히 나와주었으면 하는 시리즈물이라
    기대반 우려반 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007은 오프닝이 갑이라 보는 편이라
    오프닝이 잘 나왔다니 꼭 한번 봐야겠네요
    오프닝만 모아놓은 뮤직 블루레이가 나오면 더 좋을텐데요

    그리고 밑에 보니 환단고기 이야기가 아직도 나오는군요
    참 정말 돌아다니는 말로 국가개조라도 해야하는지

    저런 망하는 강아지들 선거나 바로 하지....

  11. realrosty 2012.11.13 23:06 신고

    저는 본드중에 이분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엄청난 노안을 자랑하는 전형적인 백인 얼굴인데...
    그게 또 매력이군요.

  12. BlogIcon 청해용왕 2012.11.14 16:10 신고

    퀸텀은 안봤는데. 평이 안좋은가 보군요.
    ....스카이폴도 아직입니다.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은 007을 안보게 되지 않을까도..
    본 시리즈는 언제 보나..ㅡㅡ;;..
    날이갈수록 영화 한편을 보기 위해서는 시간이나 비용보다는 "의지"가 더 필요해지는듯 싶습니다. ^^;

  13. BlogIcon a87Blook 2012.11.14 16:53 신고

    개인적으로 007 시리즈를 너무나 좋아해서 (대사도 몇마디 외울 정도로)... 스카이폴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근데 뭔가 평가가 극과극으로 갈리더라고요. 회사 동료는 재미 없다. 최악의 007 이었다 라고 했지만
    아는 친구(영화 엄청 봅니다.)는 진짜 재미있다고 하더라고요.
    아직 007 시리즈를 정주행 중 인지라.. (다시 보고 있어요 ㅋ) 아직 감상은 못했지만
    말씀하신 내용대로라면 무척이나 재미있을 것 같아요 ㅋ

    • BlogIcon 즈라더 2012.11.14 18:48 신고

      기존 007 좋아하는 사람에겐 극과 극의 영화...
      일반 대중에겐 그럭저럭 재미있는 영화..

      정도인 것 같더군요. 일부는 <다크나이트>와 비견할 정도로
      잘 만든 영화라고 말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