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상반기 영화계를 간단히 정리할 때 말한 것처럼 올해 한국 영화계는 이상했습니다. 다른 해 같으면 한 해를 대표하는 영화로 꼽힐만한 작품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거든요. 그간 주목받지 못하고 한국 영화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던 실력파 감독들이 본격적인 투자를 받고 제대로 오락 영화를 만들기 시작해서 이런 기현상이 일어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의 윤종빈 감독과 <건축학개론>의 이용주 감독, <광해>의 추창민 감독이 그런 감독입니다. 윤종빈 감독은 <비스티 보이즈>, 이용주 감독은 <불신지옥>을 통해 인상을 남겼고, 두 작품은 개성이 확실하게 살아 있어서 영화 애호가들에겐 꽤 유명한 상황이었거든요. 긴 시간 여러 영화로 주목받았으나 네임밸류를 얻지 못했던 추창민 감독은 <광해>를 통해 메가히트를 쳤고요.


 항상 봉준호, 김지운, 류승완, 박찬욱 등 이미 명성을 날린 지 오래된 감독들만 주목받는 한국 영화계가 좀 안타까웠는데, 2012년을 통해 새롭게 주목받는 감독이 더 많아지길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가장 빛났던 한국 영화를 뽑아보렵니다.


 <범죄와의 전쟁>은 어쩌면 올해 최고의 영화일 지도 모릅니다. 한국형 느와르의 시작이랄까요. 다른 나라와 완전히 다른 역사를 가진 한국 범죄인데도 다른 나라의 느와르/갱스터 영화 컨셉을 빌려서 한국 느와르를 만드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제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달라질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만듦새 좋고, 캐릭터 좋고, 이야기 좋으니 아마 많은 분이 이 영화에 푹 빠져들었을 겁니다. 올해 초 개봉한 영화임에도 지금까지 잊을 수 없군요. 정말 강력한 영화에요.

 

 <건축학개론>은 첫 사랑이란 테마에 있어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아주 깔끔하게 풀어낸 역작입니다. 현재와 과거의 대비, 9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배경, 첫사랑의 오해와 격정, 공포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아주 기쁘고 행복했지만, 또한 두렵고 아팠던 첫 사랑을 조금도 과장되지 않게 연출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제 첫 사랑이 떠올라 잠을 잘 수 없었어요. 어찌나 아프던지. 

 혹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최루성 멜로라고 여길 수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으니 걱정 마시길. 
 


 <도둑들>은 엄밀하게 말해서 아주 잘 짜인 영화로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다소 모호한 구석이 없잖아 있었죠. 많은 분이 1000만 관객이 들 영화는 아니라고 평가하는데, 그 이유도 잘 짜인 영화가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경쾌하면서 묵직한 느낌의 최동훈 스타일이 아주 잘 살아 있는 영화입니다. 캐릭터도 생생히 살아 있고요. 워낙 많은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다 보니 걱정 많이 했는데,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잘 떠올려 보면 <범죄의 재구성>부터 <전우치>에 이르기까지 최동훈의 장기는 캐릭터와 대사, 중의적 스토리였거든요. 최동훈은 톱스타가 여럿 나와도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감독이었습니다.


 <광해>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이야기를 뻔한 구조로 담은 영화입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강점이었어요. 뻔했기 때문에 더 많은 대중이 접근할 수 있었달까요. 지나치게 복잡한 구조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호평을 얻었지요. 

 저 개인적으론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빛, 세트 등의 비주얼 요소와 배우의 연기, 적절히 반영한 시대상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뜻밖에 꼼꼼했던 구성 요소도 참 좋았지요. 우리나라 사극의 이상적인 존재랄까요. 앞으로 사극은 이렇게 찍도록 해야 해요. 뻔한 스토리를 답습하라는 게 아니라 시대상 반영과 세트장, 미술 등에 더 신경 쓰라는 의미입니다.


 <화차>를 보고 전 신용카드 재발급을 중지했었습니다. 당시 외국 쇼핑몰 이용이 늘어나면서 신용카드를 재발급하려 했었거든요. 체크카드로 아마존이나 예스 아시아 같은 사이트를 이용하는 건 상당히 스트레스받는 일인지라 신용카드 재발급 직전까지 갔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한숨 쉬며 포기했지요. 대출, 신용등급 등과 같이 뭔가 복잡해진 현대의 금융이 만든 끔찍한 내면을 세상의 <화차>가 제대로 담았습니다. 원작 소설이 일본 소설이라서 걱정했는데, 한국의 상황에 맞게 잘 리메이크했더군요. 한 번 감상하실 필요가 있는 영화입니다.

 본래 <화차>가 아니라 <내 아내의 모든 것>을 넣으려고 했습니다만, 제가 임수정에 빠진 건지 영화에 빠진 건지 모호해서 제외했습니다. '더티 섹시'의 레퍼런스로 등극한 류승룡의 모습도 인상 깊었지만 역시 임수정이 참 사랑스럽더군요. 코미디 영화 하나 넣을 필요가 있지 않았나 싶어서 조금 고민했네요.


 뜻밖의 이야기겠지만, 올해는 독립 영화, 저예산 영화가 특히 주목받은 해이기도 했습니다. 대기업의 상영관 독식 등으로 말이 많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저예산 영화가 주목받아 자기 목소리를 냈어요. 상영관 독식은 올해만 있었던 게 아니므로 제쳐두고, 이런 현상의 진짜 원인은 다운로드 시장의 파이가 커지면서 작은 영화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으로 봐야죠. 내년엔 다운로드 시장이 더 커져서 더 다양한 영화를 만나볼 수 있길 기대합니다. 


 2012년의 한국 영화는 정말 다섯 작품만 고른다는 게 말도 안 될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은교>도 있었고, <피에타>, <후궁>도 있었지요. 생각하면 할수록 참 신기한 1년이었어요.


뱀다리) 올해 마지막 날 즐겁게 보내시길..:-)



2012/12/3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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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년 한국영화 베스트 10] 환유씨가 뽑은 2012년 최고의 한국 영화는?!

    환유, 즐겁게 놀다 2012/12/31 22:53

    26년 / 577 프로젝트 / 가족 시네마 /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 / 건축학 개론 / 광해, 왕이 된 남자 / 나는 공무원이다 / 남영동 1985 / 내 아내의 모든 것 / 내가 고백을 하면 / 내가 살인범이다 / 네..

  1. 무비돌이 jY 2012/12/31 07:16

    올 한해도 좋은 한국영화들이 정말 풍성했죠~^^ 한해동안 수고하셨구요, 2013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즈라더님 :)

  2. 2012/12/31 07:17

    비밀댓글입니다

  3. BlogIcon 노지  2012/12/31 07:24

    사회풍자 영화가 상당히 많았죠…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었는데, 여전히 사회는 그 모순을 벗어던지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 BlogIcon 즈라더 2012/12/31 10:56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그 사회 풍자의 원인조차 찾아보지 않는 대한민국이죠.
      영화 보고 나서 느낀 것을 실제로 적용하지 못하는...
      왜 이런 영화가 나온 건지 모르는..

  4. 베리알 2012/12/31 07:37

    한국 영화계를 생각해도, 한국 영화 관객 중 한명으로서도... 보다 더 다양한 감독들이 주목 받고 인정받길 기대합니다. ^^

    더티 옴므 류승룡... 남자라면 광고에서도 장난이 아니더군요. ^^;;;

  5. BlogIcon 꼬장닷컴 2012/12/31 09:01

    2012년 한해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2012년도 몇 시간 남지 않았는데 마무리 잘 하시구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 하세요.

  6. BlogIcon 은이엽이아빠 2012/12/31 09:29

    내아내의 모든것, 은교가 참 기억에 남네요.. ㅎㅎ
    2013년에도 좋은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ㅎㅎ 한해 마무리 잘하시고 좋은 하루 되십시요.^^

  7. BlogIcon ★입질의 추억★ 2012/12/31 10:12

    갠적으로 한국영화를 자주 보지는 않았지만 도둑들은 나름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즈라더님 한해 동안 수고하셨고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8. R군 2012/12/31 10:30

    정말 이네요!! 한국영화는 다 일치하는군요!!! 저 건개는 블루레이의 삭제버전?!!? 새해 첫 기념으로 건개 블루레이를 구입할 생각입니다!
    DVD는 이벤트나 누구한테 선물로T.T

  9. BlogIcon 어린쥐™ 2012/12/31 10:34

    화차가 이렇게 묻히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었죠;;ㅎ

  10. BlogIcon 짤랑이 2012/12/31 10:45

    잘 읽고 추천 누르고 갑니다. 올 한해 마지막날인만큼 의미 있는 시간 되시길!!! ^-^ ~ ~ ~ ~

  11. BlogIcon 주리니 2012/12/31 11:00

    이렇게 추려봐도 참 의미있습니다.
    저또한 올해는 독립영화에 대한 인식변화가 있었으니깐요.
    그렇게 올한해 멋지게 마무리 지으세요~

    • BlogIcon 즈라더 2012/12/31 11:02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옛날엔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저예산 영화와 독립 영화가
      대중의 눈에 띄기 시작한 한 해였던 것 같아요.

  12. BlogIcon Channy™ 2012/12/31 11:02

    저도 즈라더님께서 언급하신 영화들 다 재미있게 봤습니다...ㅎㅎ
    내년에도 재미있는 영화가 많이 나와주면 좋겠군요

  13. BlogIcon 가을사나이 2012/12/31 11:11

    그중에서 광해가 개인적으로 젤 빛이 나거 같네요

  14. BlogIcon 컴터맨 2012/12/31 11:12

    이 중에서 본 것은 건축학 개론과 도둑들, 두편밖에 없네요. 그나마 도둑들은 IPTV로...;;;
    다가오는 한 해의 목표 중에는 한 달에 영화 한 편 이상 보기를 넣어야겠습니다!

  15. BlogIcon 하늘나리 2012/12/31 11:47

    즈라더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 한 해 수고 많으셨어요.^^

  16. BlogIcon Zoom-in 2012/12/31 12:04

    저도 고르신 다섯편의 영화가 올해의 영화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중 아직 광해만 못 보았네요.^^

  17. 싸장님 2012/12/31 13:17

    두편 봤네요..ㅎㅎ
    내년에도 좋은 영화 부탁드려요~

  18. BlogIcon 유진엔젤 2012/12/31 15:04

    새해 건강하시고 복많이 받으세용~
    한해 다사다난...했던 일들은 모두 추억속으로 묻어두고^^

  19. BlogIcon 대관령꽁지 2012/12/31 15:40

    꽁지도 본영화가 서너편이 되네요...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

  20. BlogIcon 시렌 2012/12/31 20:36

    음! 폰으로 로그인해선지 방명록이 안뵈이는구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1. BlogIcon 릿찡 2012/12/31 20:51

    사실 스토리 매체에서는 상활설정도, 세계관도, 그 밖에 무슨 교훈이나 기타등등도 결국에는 캐릭터를 돋보이기 위한 주연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캐릭터가 살면 좋은거고, 캐릭터가 죽으면 그 밖에 모든게 좋아도 대중의 외면을 받죠... 물론 그 밖에 모두가 좋은데 캐릭터가 안사는 경우는 일부러 의도하지 않은 이상 힘들지만서도

  22. BlogIcon 감자꿈 2012/12/31 21:30

    전 고르신 작품들 중 '건축학개론'만 봤네요. ^^
    그 좋은 영화들을 못 봤다니 말이죠. T.T

    즈라더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23. BlogIcon 울프팩 2012/12/31 22:42

    그러고보니 올해 기억에 남는 우리 영화들이 여럿 있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4. 손님 2012/12/31 22:50

    거의 모든 영화를 봤네요
    좋은 영화가 다양하게 나와줘서 정말 좋더군요

    더불어 블루레이 소식도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도둑들 과 후궁 블루레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서 정발소식이 들렸으면 합니다

    남은 해 마무리 잘하세요 ^ ^

  25. BlogIcon 환유 2012/12/31 22:53

    좋은 한국영화들이 많아서..저는 best10을 뽑는 것도 어려웠어요.^^
    2013년에도 즈라더님의 좋은 글들 기대하겠습니닷!

  26. BlogIcon 알숑규 2013/01/01 01:37

    올해, 아니 작년은 장르가 다양했던 점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골라보는 재미가 있었달까요.
    어쨌든 올 한해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27. 스카이워커 2013/01/01 03:20

    제가 생각했던 올해 베스트 한국 영화 <범죄와의 전쟁>이 베스트로 뽑혀서 매우 반갑네요.
    항상 뛰어난 필력을 몰래 배우고 가다가 댓글 남깁니다.
    새해 항상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28. BlogIcon 듀륏체리 2013/01/01 16:08

    개인적으로는 경찰이나 조폭을 소재로 다루는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범죄와의 전쟁은 그와 비슷하면서도 우리 사회의 단상을 그대로 나타낸 영화라..
    영화를 통해 우리사회가 변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더라구요!

    • BlogIcon 즈라더 2013/01/01 20:14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범죄의 전쟁은 단순한 느와르를 벗어나 시대상까지 반영했으니..
      이만한 작품 다시 보기 어려울 것 같아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ㅎ

  29. BlogIcon 붉은비 2013/01/02 09:17

    윤종빈은 [비스티 보이즈] 보다는 계속 그 전작인 [용서받지 못한 자]로 기억되고 있었는데
    [범죄와의 전쟁]으로 포텐을 미친 듯 폭발시켰죠... ㄷㄷㄷ
    느와르라는 장르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갈등을 빚는 주 캐릭터 간의 무게감을 밸런싱하는 일인데
    이걸 거의 [대부] 내지 [좋은 친구들] 급으로, 게다가 무척 여유만만하게 해치워버렸다는 게 경악스러웠어요.

    • BlogIcon 즈라더 2013/01/02 20:45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사실 그 정도로 재능있는 사람이라곤 생각지 못했거든요.
      이후 작품을 계속 봐야 알겠지만, <범죄와의 전쟁>이 우연히
      나온 작품이 아니길 빕니다.

  30. BlogIcon 마시마로 2013/01/03 21:10

    저는 <은교>, <후궁>, <남영동 1985>, <피에타>, <범죄와의 전쟁>, <두 개의 문>이 2012년을 빛낸 영화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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