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글래디에이터>의 성공이 있었고,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AI를 가진 디지털 캐릭터로 전쟁 영화의 역사를 다시 썼다. 그 결과 배경이 로마든 십자군이든 간에 크고 작은 에픽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가운데 가장 이질적인 작품을 골라보라면 역시 드라마 <ROME>이다. <ROME>이 훌륭했던 것은 당대 로마의 시대상을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표현했고, 그 안에서 있을 수 있는 일들을 역사적 사건과 연결해 연출했기 때문이다. 비록 시청률이 좋지 않아 두 번째 시즌으로 마무리해야 했지만, 작품이 대중에게 미친 영향은 상상을 초월했다. <ROME>이 없었다면 <스파르타쿠스>도 없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센츄리온> 리뷰에서 왜 이런 얘기를 꺼내냐면, <센츄리온>도 <ROME>과 성향이 비슷해서다. <센츄리온>이 <ROME>을 쫓았다는 게 아니라 영화의 여러 컨셉과 연출 방식을 보았을 때 닐 마샬 감독이 현실성에 비중을 두고 영화를 만든 게 분명해 보인다. 다만 글쓴이는 <ROME>과 다르게 <센츄리온>에 높은 평가를 내리기 어려울 것 같다.


 영화는 소재와 연출 방식이 적절하게 어울려야 성공한다. 예를 들어서 <글래디에이터>나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이 <ROME>의 액션 연출과 비슷했다면, 걸작이란 칭송을 얻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소재에 따라서 현실성의 정도에 차이를 둬야 한다는 의미다. 

 <센츄리온>은 귀환병에 관한 이야기다. 더러운 전장에서 살아남았고, 군인으로서 의무까지 다한 뒤에 모든 책임을 벗어 던지고 귀환하고 있는 로마군이 픽트족의 추격병에 쫓기는 이야기를 담았다. 여기서 더러운 전장이란 가치가 없는 전장을 말한다. 영화 속 로마군과 픽트족의 전쟁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전쟁이다. 본래 명예나 의무와 같은 것은 군인의 사기 진작을 위해 '억지로 포장된' 망상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억지로라도 찾을 수 있는 곳이 군인에게 최고의 전장이다. 적어도 전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있고, 목표가 분명하다면 군인에겐 최선의 전쟁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로마와 픽트족의 전쟁은 그런 게 없었다. 그저 정치인의 야욕과 권력욕만 있을 뿐이다.

 영화 속에서 로마군과 픽트족의 전쟁이 서두에서 끝나버리고 귀환병 이야기로 좁혀질 때 대충 눈치챌 수 있다. 식민지를 얻음으로써 가지게 될 부와 노예들은 오로지 상위층의 것이다. 정벌에 성공했다는 전공 역시 상위층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소모되는 병력은 말 그대로 소모품에 불과하고, 정치가에게서 버려지는 장기패다. 한 번 건드려보고 실패하면 그 존재 자체를 깨끗하게 지울 수도 있는 존재. 그래서 로마군과 픽트족이 싸운 전장은 '더러운 전장'이 된다. 로마군과 픽트족의 전투가 서두에만 등장하는 이유는 이런 사실을 가정 먼저 감상자에게 알려두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픽트족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주인공과 동료들은 포로로 잡혀간 중요 인물이 있고, 그들을 구해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깨닫는다. 만약 그대로 돌아가면 참수당할 게 분명한 상황. 몰랐다면 넘어갈 수도 있겠으나 알고서 넘어가면 안 되는 셈. 그들은 집단을 꾸려 픽트족의 야영지로 들어가 포로를 구출하려 하는데, 그 과정에서 픽트족 수장의 아들을 죽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순간부터 이 로마 생존병은 픽트족의 최정예 추격병에게 쫓기게 된다. 결국, <센츄리온>은 전쟁 영화가 아니라 '탈출 영화'의 변형 혹은 '추격 액션 영화'로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스릴 넘치는 오락적 액션이지 '지나친 현실성'이 아니게 된다.

 그러나 닐 마샬 감독의 선택은 달랐다. 영화에서 나오는 액션을 살펴보면 화려한 검술 같은 건 조금도 나오지 않는다. 영화 속 최고의 무사이자 뛰어난 생존력의 주인공 퀸터스(마이클 패스밴더 분)가 보여주는 검술도 최대한 현실성을 고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주인공의 액션이 이러니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액션이 어떨진 뻔할 뻔자. 나쁘다고 평가할 수 없지만, 지나치게 현실적이라 영화의 소재와 알맞지 않은 액션이다.

 최대한 현실적으로 가고자 한 닐 마샬의 태도는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탈출극은 일반 오락 영화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똥줄타는 전개로 벌어지는 게 아니라 자연을 상대로 한 생존 싸움, 퀸터스의 머리 싸움에 가깝도록 그려졌고, 액션 장면에선 육점과 피가 난무하고 곳곳에서 신체 훼손 장면이 있는 그대로 등장하는 등 많은 부분이 현실적이다. 생존병들이 살기 위해서 동물의 따뜻한 피를 마시는 장면이나 소화되지 않은 풀을 꺼내 먹는 장면을 보면, 엄청나게 추운 설산을 제대로 쉬지도 않고 넘은 비현실적 요소를 어떻게든 무마하려 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센츄리온>에서 애간장타는 추격과 생존병과 추격병의 절묘한 미로 싸움, 화려한 검무를 보고 싶다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별로 힘이 없다. 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지만, 숫자도 적고 액션 역시 현실의 범주를 과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힘은 클라이막스가 아니라 마무리 장면에서 나온다. 이 영화가 현실성을 추구한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것 가운데 '더러운 전장'을 말했는데, 여기에 '로맨스'도 추가해야 옳다. 퀸터스와 마녀(이모겐 푸츠 분)의 로맨스는 선도 넘지 않고 급하게 전개되지도 않으므로 더욱 매력적이고, 마무리 장면은 '더러운 전장'과 '로맨스'를 완벽하게 맞물려놨다. 욕심에 눈이 멀어 있는 정치가의 (자신을 위해) 합리적인 결론과 그로 말미암아 퀸터스가 처하게 되는 위기를 충분히 설득력 있는 로맨스로 마무리했다.

 두 사람의 '이탈자'가 만나 서로의 외로움을 깨닫고, 마주 보기 시작한다. 영화의 어울리지 않는 연출이나 다소 심심하고 허술한 내러티브도 이 마무리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다. 좋은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영화지만, 마무리 하나는 아주 적절하게 잘 해줬달까. 이모겐 푸츠는 어떤 상황에서든 극을 단단하게 하는 힘이 있다.

 무리에 섞이지 못한 두 이단아에게 행복이 함께 하길. 

 



 북미판 블루레이의 화질은 아주 쨍하진 않아도 좋은 편인데, 무엇보다 영화의 창백한 색상이 아주 잘 표현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잘 녹아 있어서 닐 마샬 감독이 이 블루레이를 감상하면, 자신이 찍어낸 스코틀랜드 로케이션 장면에 만족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영화 속 스코틀랜드의 모습 가운데 일부는 <스카이 폴>에서도 만날 수 있었지만, <센츄리온>의 풍광이 더 아름다웠던 것은 상당히 많은 제작비를 들여 로케이션 촬영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장엄한 자연의 모습을 블루레이가 아주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다만, 이런 매력적인 부분 만큼 이건 좀 아니다 싶은 부분도 있다. 영화의 어두운 장면을 보면 쉽게 느낄 수 있겠지만, 블랙의 깊이가 매우 부족하다. 게다가 암부의 계조도 심하게 망가져 있는데, 완전히 형형색 블록 노이즈로 가득 차는 장면마저 있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겠다. 마스터링 단계에서 조금만 더 신경 써줬어도 이렇게 심하게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스페셜피처엔 이렇다 할 영상이 없다. 또한, 모두 SD다.


 최근 구매해둔 북미판 블루레이 리뷰를 전부 하려는 생각에 <드라이브>를 포함한 여러 영화 블루레이 리뷰의 개요를 적당히 적어놨는데, 갑자기 <드라이브> 블루레이 정식 출시 소식이 들렸다. '나오지 않는다.'라는 확답이 있어서 북미판으로 구매했더니 이제 와서 출시라. 기쁜 소식이지만, 제발 어중간한 처지에서 확답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베리알 2013.01.16 09:55 신고

    이 작품이 언제 국내에 블루레이로 나왔었지???...하면서 내리다 보니, 아! 북미판이군요. ^^;;;

    예고편이나 올가 쿠릴렌코 분위기 보고는 거한 액션물 하나 나왔나 싶었는데,
    이후 평들이 워낙에 안 좋은 거 보고 설마설마했는데... 헨타이사마의 리뷰를 보니,
    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영화인가 봅니다. 그래서들 그렇게 혹평이 많았나... -.-;;;

    • BlogIcon 즈라더 2013.01.16 10:35 신고

      예고편이나 스틸사진을 보고 예상할 수 있는 유형과 상당히
      거리를 두는 편입니다. 올가 쿠릴렌코는 아예 벙어리에 표정도
      거의 없는 여전사로 나와서 매력을 느끼기 어려웠어요.

  2. BlogIcon 날아라뽀 2013.01.16 10:00 신고

    한 번 보고 싶은 영화인데요.
    저는 이런 장르를 좋아해서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3. BlogIcon RGM-79 2013.01.16 10:08 신고

    갑옷하고 무기류만 ㅎㅇㅎㅇ..
    공화정 말 제정 초기 갑옷이 가장 멋지죠.

  4. BlogIcon 붉은비 2013.01.16 11:20 신고

    전반적으로 썩 나쁘지 않으나 그다지 매력도 없었다는 게 안타까운 작품이었죠.
    시놉시스는 꽤 괜찮았었는데... 뭐 그래도 [킹 아더] 보다는 훨 재미있게 봤었습니다.
    키이라 나이틀리보다 이모겐 푸츠가 더 이쁘기도 하고요. ㅋㅋ

  5. BlogIcon 릿찡 2013.01.16 14:02 신고

    예전에 한국은 너무 사극 위주로 돌아간다 라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이재 서양도 남말할 처지는 못되는군요. 멜로가 강세이지만 그건 만국 공통이고, 판타지SF가 강세이지만 그건 돈이 있는 자에 한에서 만국 공통이니 점차 한국이나 미국이나 취향은 획일화 되는듯요.

  6. BlogIcon 울프팩 2013.01.16 23:07 신고

    이런 영화도 있었군요. 국내에 개봉했는 지 모르겠지만, 쓰신 글을 보면 국내에 블루레이가 출시돼도 많이 팔리긴 힘들겠네요.

  7. 손님 2013.01.18 22:28 신고

    방송에서 두 번이나 봤는데 애매하더군요
    글래디에이터 급의 작품인 줄 알았는데....

    블루레이가 정발 출시되는 건 좋은데 너무 뜬금없이 나오니
    예측이 힘들더군요 제대로 공지가 있으면 좋을텐데 말이죠

    더구나 안나온다 확답까지 한 후에 나오는 건 정말 안습이군요
    구매하진 않았지만 저도 비슷한 사례가 있어서 공감이 됩니다

    혹여 도움이 될까 해서 올립니다
    콜롬비아나 도 출시예정입니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