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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차례의 치명적 실패가 류승완 감독에게 많은 것을 남긴 모양이다. <짝패>까지 이어졌던 류승완 특유의 악동적 기질, 과거 B 영화나 홍콩의 코미디 영화가 보였던 코미디를 재창조해낸 연출이 <부당거래>부터 색채를 잃었다. <다찌마와리>의 실패가 그에게 얼마나 큰 타격을 줬는지 알 만하다. <다찌마와리> 이후 상당히 긴 공백 기간이 그걸 증명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기분도 든다. 그렇게 절치부심하던 류승완 감독이 <부당거래>라는 정치 느와르로 '난 이런 소재로도 대중적 오락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라고 외쳤고, <베를린>으로 '이만하면 제대로지?'라고 묻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은 첩보영화입니다.' 라고 말하는 영화는 세계적으로 찾아봐도 별로 없다. 본래 첩보영화란 장르 자체가 모호한 탓이다. 헐리우드는 첩보영화를 '스파이가 나오는 블록버스터'로 규정지었던 모양이고, 두 개의 눈 이외에 '작가주의'라는 이름의 눈을 하나 더 가진 감독이나 각본가들은 첩보영화란 장르를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구로 삼을 뿐이었다. 제이슨 본이란 이름이 순식간에 첩보물의 본좌 자리에 등극한 것은 <미션 임파서블> 이후 오랜만에 설명하기 모호했던 첩보영화란 장르를 규정할 법한 영화가 탄생했기 때문이었다. <본 슈프리머시>가 바로 그 영화다.

 <베를린>이 인상깊은 부분은 제이슨 본 트릴로지를 상당히 쫓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제이슨 본이 만들어둔 '틀'은 이미 전 세계가 첩보물의 기본 공식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이것을 쫓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제작비는 물론이고 영화 제작 환경과 기술력의 한계가 본 시리즈를 쫓았던 여러 영화의 가랑이를 찢어놨으니까. 수차례의 실패 끝에 많은 영화가 제이슨 본의 첩보 장르를 포기하거나 어설프게 연출한 뒤 이렇게 거짓말했다.

 "우리가 제이슨 본을 따라 할 필요 있나? 우린 우리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 거다."

 그리고 류승완 감독은 <베를린>을 만들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핑계대지마. 나처럼 제대로 해보라고!"

조국과 인민을 위해 힘을 다 해왔어. 그런데 조국은 변했고, 인민은 죽어가고 내 아내는 변절자 혐의를 받고 있어. 내가 너무 순진하게 살아 왔나봐.


 영화는 하나의 점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여러 첩보 영화가 개인의 이야기에 집중한 것과 상당히 다른 방식인데, 덕분에 <베를린>의 전반부는 굉장히 산만한 편이다. 조금 과도할 정도로 정보가 쏟아지는 바람에 인물 관계를 파악하는 것도 정신없는 상황에서 사건의 전말까지 이해하려니 보통 집중력으론 한 번에 다 파악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그리고 애초에 감독 역시 이런 정보들을 다 파악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베를린>은 중반부터 꼬이고 꼬여 있던 여러 인물을 한 점으로 모여가는 집탄력을 발휘하고, 그 방법으로 플래쉬 백을 통한 '재방송'을 이용한다. 스토리 이해만 도울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전반부 산만한 전개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이 영화는 <베를린>이다. 사방의 스파이가 활약했던 곳이고, 분단의 아픔도 가지고 있는 도시. 이 도시에 우리나라가 얽혀 있는 정치적, 국제적 상황을 투영하려는 게 류승완 감독의 의도였던 듯하다. 산만해지는 것을 감안하고 최대한 많은 정보량을 전반에 밀집시킨 것은 후반부에 벌어질 (정말 리얼한) 정치적 촌극에 공감할 수 있도록 유도한 셈. 그리고 이 부분은 상당히 성공적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처럼 휴전선이 무너지진 않았지만, 이미 북한은 사상, 이념과 같은 것은 저 먼 곳으로 떠나보내고 자폭 행위를 거듭하고 있다. 말 그대로 자폭해버리면 좋겠는데, 절대 혼자 죽을 생각이 없어서 '자폭테러'로 변모하는 게 문제가 된다. 그런 한반도의 쓰라린 진풍경이 베를린이란 도시에서 펼쳐진다.

 이런 배경 요소들이 극의 중심을 건드리면 그 순간부터 <베를린>은 조잡한 영화가 되고 만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제이슨 본을 쫓으려다 실패한 주제에 "제이슨 본을 쫓을 필요 없어!"라고 비겁한 변명을 해온 수많은 첩보 영화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걷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 <베를린>의 배경은 사건을 급박하게 하는 수준에 그치고 캐릭터는 그 배경의 이야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여기에 놀랍게도 전지현이 연기한 련정희가 한몫을 했다. 보편적이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녀의 이야기가 이 영화에 난잡하게 흩어져 있던 수많은 요소를 하나로 뭉치게 한다. 그리고 이런 련정희 역할을 전지현이 완벽하게 연기했다. <베를린>에서 련정희 캐릭터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캐릭터일 수 있고, 글쓴이는 전지현의 연기엔 아무 불만이 없다.

이야~! 인민의 영웅 표종성이가 내 손아귀에 있네?


 필모그래피 대부분을 액션 영화에 할애하고 있는 류승완 감독이기에 액션을 기대한 분이 많을 것이다. 글쓴이는 이 부분에 관해 다소 미묘한 입장에 서 있었는데, 류승완의 액션 연출엔 불만이 없지만, 정두홍의 액션 디자인엔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간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매너리즘을 보여왔던 정두홍은 결국, 박정률이란 걸출한 후배에게 (잠깐) 한국 최고의 액션 디자이너라는 칭호를 넘겨주기까지 했었다. 어쩌면 <베를린>은 류승완만이 아니라 정두홍에게도 중요한 영화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두홍은 놀랍게도 매너리즘을 깨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간 화려한 것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바람에 껄끄러웠던 정두홍의 액션은 류승완의 여러 차례에 걸친 컨펌을 통해 <베를린>에서 강렬해지고 깔끔해졌다. 근래 여러 영화에서 단타, 관절기를 중심으로 하는 실전 무술을 이용했던 것처럼 정두홍 역시 그랬는데, 이용 방법이 꽤 독특하다. 본래 정두홍이 추구하던 아크로바틱 태권도(?) 액션이 아주 약간 섞여 들어갔고, 합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절묘함을 포기하고 상당히 투박하고 타격감이 강한 액션이 주로 등장한다. 클라이막스에서 권총을 손도끼처럼 사용하는 부분과 필요한 순간에 딱 등장하는 바위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지만,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등장한 - 줄이 발에 걸려 낙하하는 - 액션 디자인을 다른 방식으로 더 과격하게 활용했다는 점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베를린> 속 훌륭한 모방의 한 예랄까.

우린 로터리에서 좌회전도 안 하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우회전할 때 왼쪽도 보게 되더라고.


 이 영화에서 한석규란 배우가 다소 소모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글쓴이가 영화의 성격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묵직한 캐스팅과 영화 전반부에 펼쳐놓은 카오스, 베를린이란 무거운 도시를 배경으로 하다 보니 글쓴이가 류승완 감독의 성향을 잠깐 잊고 있었던 셈이다. 그에게 붙은 별명 '액션 키드'는 그의 영화를 모조리 관통하는 하나의 성향이나 다름없고(<부당거래> 역시 조금도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 영화 역시 그가 추구해왔고 앞으로도 추구할 '강력한 오락 영화'다. <황해>나 <악마를 보았다>와 같은 씁쓸한 하드보일드 스릴러가 아니란 의미. 남한 정부와 북한 공산당, 국정원을 도매급으로 비판하는 직설적인 설정을 담가 그걸 스릴을 위한 도구 혹은 배경 스토리 정도로 머물게 한 뒤 여러 줄기의 스토리 라인을 하나로 묶어버린 것에서 이미 류승완의 느낌이 확실하게 풍긴다. <다찌마와리> 이전의 류승완 영화와 다른 것은 코미디 혹은 오마쥬에 관한 집착을 버렸다는 점 하나뿐이다.

 영화의 완성도와 별개로 지금 <베를린>에게 닥친 표절 시비는 류승완이 확실하게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글쓴이가 보기에 분명히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헐리우드였으면 소송 걸려서 제대로 당했을 큰 문제다. 선배이자 스승이나 다름없는 박찬욱을 본받아보자. 박찬욱은 <박쥐>의 원작을 <테레즈 라껭>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테레즈 라껭>을 읽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박찬욱이 밝히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라고 말한다. 박찬욱처럼 어떤 식이든 작품 활동에 큰 영향을 준 작품이 있다면, 순순히 인정하고 저작권을 확보해두는 게 옳은 방법일 것이다.

 <베를린>이 표절했다고 말이 많은 <차일드44>는 리들리 스콧이 톰 하디를 캐스팅해서 이미 제작에 들어간 소설이다. 리들리 스콧 자신이 직접 감독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히 잘 만들지 않는 한 <베를린>보다 재미있진 않을 것 같다. 그 정도로 재미있게 즐길만한 오락영화를 만들어놓고 이런 논쟁이 생기게 하다니. 류승완 감독의 실책임에 틀림이 없다.

뱜다리) 씨너스(메가박스) 이수 5관의 음질은 역시 '미칠듯이' 좋습니다.

뱜다리) 총격씬 비주얼 정말 끝내줍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BlogIcon 닥터콜 2013.02.12 07:39 신고

    이 영화는 희한하게 볼때는 그렇게 재밌다 이런 생각이 안들었는데 보고나니까 자꾸 아른아른 장면들이 떠올라서 그 실체를 확인하러 한번 더 보러갈까 합니다. 무엇보다 류승범 연기가 정말 좋더라구요.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흠 잡을데 없는 북한말을 구사하고 그의 시점에서 감정을 서술하지 않는 영화였음에도 미묘하게 느껴지는 악행 다음의 감정들이 참 좋더라구요. 한석규 씨는 뭐 언터쳐블이고 그 다음으로는 의외로 하정우보다 전지현의 연기가 더 인상적이었어요. 북한말은 이상했지만.. 까불지 않고 침착한 연기도 괜찮더군요.

    • BlogIcon 즈라더 2013.02.12 14:31 신고

      전지현 특유의 감정 과잉도 없었고...
      표정 연기도 기가 막혔지요. 한석규를 보고 옆에 있는
      돌맹이를 집으려는 그 연기가...

  2. BlogIcon 미우  2013.02.12 07:54 신고

    호오 상당히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로군요. 많은 호평이 있는 것을 보니 한 번쯤은 영화관을 찾아서 보고 싶어집니다.

  3. 베리알 2013.02.12 08:08 신고

    요즘 화제(?)의 영화군요.
    같은 걸 놓고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평들도 갈리고...
    시간이 되면 한번 보고 싶기는 합니다.

    아... 생각해 보니까, 이수 5관에서 보셔서 영화의 매력이 좀 더 Up되셨을 가능성도 있겠군요.
    같은 영화라도 이수 5관의 빠와~로 보게 되면 왜인지 더 재미있게 본 느낌이 들던데 말입니다. ^^

  4. BlogIcon 사과랑 2013.02.12 08:55 신고

    메가박스 음질이 좋군요...CGV음질..완전 구렸어요. 그리고 표절이라곤 하는데, 그냥 평준화되는 듯한 느낌으로 받아들였어요. 요즘엔 어느 영화나 비슷한 장면도 많고해서요.^^

    • BlogIcon 즈라더 2013.02.12 14:33 신고

      그렇긴 한데.. 베를린의 경우 너무 닮아서 조금 문제가 될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지금 헐리우드에서 원작삼아 제작중인 소설이라..

  5. BlogIcon 짤랑이 2013.02.12 10:23 신고

    잘보고 추천 꾸 ~ 욱 누르고 갑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 ^

  6. BlogIcon 나비오 2013.02.12 11:14 신고

    하정우는 하정우스럽게 류승범은 류승범 스럽게 나와서 부답없이 봤답니다. ㅋㅋ
    전지현은 많이 성장한 것 같구요

  7. nikita9@nate.com 2013.02.12 11:31 신고

    기다렸습니다. 즈라더님의 베를린. 제가 읽은 리뷰중에서 가장 '개인적'으로 공감가는 부분이 많은 리뷰여서 행복합니다. ㅎㅎ..

  8. BlogIcon RGM-79 2013.02.12 12:52 신고

    로타리에서 좌회전.. 실제 대산가보죠?
    기묘하게 현실적인 대사로군요.

    • BlogIcon 즈라더 2013.02.12 14:35 신고

      넵. 영화에서 나오는 대사인데..
      류승완 감독이 원래 현실적입니다.
      <부당거래>에선 검찰 조직을 제대로 비판했죠..

  9. BlogIcon 울프팩 2013.02.12 17:33 신고

    나이든 한석규를 보고 흘러가는 세월을 절감했습니다.

  10. BlogIcon 에스델 2013.02.12 18:07 신고

    명절 연휴 잘 보내셨는지요?
    저는 좀전에 집에 돌아왔습니다....ㅎㅎ
    베를린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이렇게 리뷰를 보니
    더 보고싶어집니다.
    편안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11. BlogIcon Kamiyama 2013.02.12 22:57 신고

    베를린 봐야하는데 ㅎㅎ 얼마전 극장 갔을때 다이하드 5 를 선택하는 바람에..ㅠ
    꼭 보고싶네요. 예전 별명이 한석규였던적도 있어서[?]

  12. BlogIcon 환유 2013.02.13 07:42 신고

    '이만하면 제대로지?' 공감!!!
    본 시리즈가 생각이 안 난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만들어 낸 것도 사실 대단하다고 봤어요.
    거기에 류승완 감독 스타일도 덧 입혀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졸작은 아니라는 평을 내리고 싶어요

  13. 2013.02.13 13:26

    비밀댓글입니다

  14. 블루레이는 거의 확실히 나올것같으니,,전 블루레이를 기다리거나,,,흠,,, 그래야겠네요 ^^ 재밌게 리뷰읽었습니다

  15. BlogIcon 산다는건 2013.02.13 19:51 신고

    액션도 재밌었고 스토리도 괜찮았다고 생각됩니다. 챠일드 44와의 관계는 분명히 밝혀야 할 부분이지만 현재로서는 사실 관계를 모르니 그 부분을 제외하면 상당히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 BlogIcon 즈라더 2013.02.14 00:20 신고

      개인적으론 상당히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 부분을 제외하고 보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탄생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16. 손님 2013.02.14 00:22 신고

    간만에 좋은 한국영화가 나온 것 같아서
    블루레이가 나와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극장은 가격도 오르고 도저히 볼 마음이 안생기더군요

  17. BlogIcon ageratum 2013.02.15 10:30 신고

    스트레스 풀기용으로 보기에 딱 좋은거 같더라구요..ㅋㅋ
    적당히 생각하게 만들고 화려한 액션보고 말이죠..^^

  18. 람푸 2013.02.16 21:56 신고

    음... 원빈 주연의 '아저씨'와 비교해서 '베를린'의 액션은 어떤가요?

  19. BlogIcon 시렌 2013.02.16 22:14 신고

    한석규 정도되는 배우가 배역을 맡을 이유가 없었다 소리부터 해서 혼자 붕뜬 느낌이다 소리까지 나오는데, 일군에선 '차일드44'에 한석규 캐릭터가 없었기 때문 아니겠는가 의혹을 제기하더군요. 표절논란이 있고부턴 어떤 얘기를 해도 저 책이랑 연관짓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졌습니다.

    • BlogIcon 즈라더 2013.02.17 13:46 신고

      그게 바로 문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둔 건지..
      이와 관련해서 류승완 감독이 인터뷰한 걸 봤는데,
      그 자료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일반 대중이
      어떻게 이해하란 건지..

  20. ㅁㄴㅇㄹ 2013.03.18 01:00 신고

    총격신 자체는 볼만한데 중동 애가 데져트이글 들고나온건 확 깨더라고요 브라우닝 하이파워를 들고나왔다면 중동 특유의 묵직한 느낌이 났을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