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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역사를 빛내는 인물이라 불리지만, 실패도 만만치 않게 겪었던 조조. 반동탁연합에 참가해 서영과 전투를 벌여서 패배한 일, 서주대학살 등 성공만큼이나 실패도 많았고, 그런 실패를 딛고 나서야 가장 강력한 인물로 인정 받았다. 그런 그의 실패 가운데 가장 굴욕적인 건 역시 여양 전투다. 원소에 대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있던 그에게 이 실패는 꽤나 아팠을 것이다.


 조조가 원소에게 얼마나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는지 기록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유비가 조조에게 투항해 함께 연회를 열었을 당시, 조조는 유비의 재능을 알아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하에 영웅은 그대와 나뿐인 듯 하오. 본초(원소)와 같은 무리는 낄 수 없소.]


 당시 조조는 원소의 손아귀에서 갓 벗어난 상태로 원소의 그늘에 묻혀 있었던 설움이 폭발했던 것 같다. 유비가 엄청나게 뛰어난 인물이란 건 이후 사실로 판명 나지만, 굳이 이 대화에서 원소를 언급할 필요가 없다. 조조의 '상전'에 가까웠고, 조조가 물리쳐야 하는 상대 가운데 가장 거대한 인물이 원소 아니던가. 실제 조조의 재능이 원소보다 위가 아님을 관도대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원소가 조조보다 한 수 위의 인물이란 건 아니다.)


 조조는 관도대전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원소에게 굴욕을 당한다. 원소는 큰 패배를 당했음에도 연주 인근까지 내려와 군세를 수습해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는 괴력을 보여준다. 연주는 조조의 영역. 조조는 원소가 자기 영역까지 내려와 군세를 수습하는 걸 두고 보고만 있었던 셈이다. 무제기에는 창정에 쳐들어온 원소를 조조가 격퇴했다고 되어 있지만, 다른 기록엔 그런 이야기가 조금도 존재하지 않고, 군세를 수습했다는 기록만 존재한다.


 202년, 북진하지 못하고 허창에서 머뭇거리던 조조는 원소가 죽고 나서야 북진을 시작한다. 여기엔 원소 사후 세력 분열이 계기가 되었다. 원소의 두 아들인 원상과 원담이 후계자 다툼을 벌였던 것. 이 허점을 파고든 조조는 원씨 일가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데, 이 과정에서 원상에게 어마어마한 패배를 당한다. 조조가 여양에서 자기 손자뻘인 녀석에게 패배해 허창까지 도망친 대사건이다.


원상은 자타가 공인하는 꽃미남이었다고 한다. 능력과 인품, 외모를 다 갖춘 엄친아였던 셈이다.


 이 전투가 조조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진수의 삼국지에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열전에 흩어진 여러 기록을 조합해봐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삼국지 곽가전이다.


[(태조를) 뒤따라 원소(袁紹)를 격파하고, 원소가 죽자 또한 (태조를) 뒤따르며 여양(黎陽)(→기주 위군魏郡 여양현)에서(원)담(袁譚), (원)상(袁尙)을 쳤는데 연달아 싸워 여러 차례 이겼다. 제장(諸將)들이 승세를 타서 나아가 공격하자고 하니(곽)가가 말했다.

“원소는 이 두 아들(→원담과 원상)을(모두) 사랑하여 적자(適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곽도(郭圖)와 봉기(逢紀)가 그들을 위하여 모신(謀臣) 노릇을 하여 그들 사이에서 필시 서로 번갈아 다툴 것이니 다시 서로 사이가 멀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급히 공격하면 (원담과 원상은) 서로 도울 것이고, 느슨하게 하면 뒷날의 다툼이 반드시 생겨날 것입니다. 남쪽으로 형주(荊州)를 향하여 마치 유표(劉表)를 칠 것처럼 하면서 그 변화를 기다리느니만 못합니다. 변화가 생긴 뒤에 그들을 공격한다면 일거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연이은 승리가 있었다면 당연히 승세를 타고 나가야 옳다. 기록을 잘 읽어보면 곽가가 '승세를 타고 공격'이란 주장 자체를 반대한 흔적이 없어서, 둘이 싸우도록 놔두자는 이야기를 하는 게 뜬금없게 느껴진다. 오히려 여양에서 연이어 승리했다는 기록 대신 '여양에서 크게 패배하자, 조조가 크게 분노했다.'라는 문구를 넣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된다.


 이는 장료 열전에서 재차 확인할 수 있다.


[태조를 수행해 업을 공격했지만, 원상이 굳건히 지켜 이길 수 없었다.]


 후한서 원소전에선 아예 쐐기를 박는다.


[조조가 계속 군을 전진시키자 원상이 역격하여 이를 깨뜨렸다. 조조는 허도로 퇴각했다.] 


 이 전투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냐면,


[건안 8년(203) 봄 3월, 성의 외곽을 공격하자 출전하니, 공격하여 대파하였고, 원담과 원삼은 밤에 달아났다.


여름 4월, 업(鄴)으로 진군했다.


5월, 허도로 돌아오고, 가신(賈信)을 남겨 여양에 주둔토록 했다.


기유(己酉)일, 영을 내리길 “『사마법(司馬法)』에 ”장군은 죽어서 퇴각한다(將軍死綏)“고 했다. [주 : 『위서』에 이르길 「수(綏)는 물러난다(卻) 이다. 한 척(尺)을 전진한 것이 있어도 한 치를 물러섬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조괄(趙括)의 모친은 조괄에게 연좌되지 않도록 요청했던 것이다. 이는 옛날의 장수는 밖에서 군대가 패배하면, 안으로는 집안이 죄를 받는다는 것이다. 장수들에게 명하여 정벌을 한 이해, 다만 공을 상주고, 죄를 벌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나라의 전범(典範)이 아니다. 여러 장수들에게 출정을 명령하니, 패한 군대는 죄를 받을 것이오. 이로움을 그르친 자는 관작을 면탈(免脫)할 것이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패전해도 질책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이제 패배할 시 관작을 면탈하겠다고 말할 만큼 처참하게 패배했다. 기록을 보아 4월에서 5월 사이에 여양 전투가 있었던 모양. 사실상 '고백'에 가까운 기록이 아닌가 한다. 조조 자신이 허창까지 도망친 것부터가 당시 상황을 증언한다.


 조조는 굴욕을 당한 뒤 곽가의 계책을 따라 원상과 원담이 반목하기를 기다린 끝에 기회를 포착해서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북쪽 끝까지 쫓아가 기어이 원상을 죽이고 만다. 자기 굴욕을 감추기 위한 집착의 여정이랄까. 조조가 하북을 넘어 오환과 요동까지 무리한 정벌전을 펼친 건 전부 이 충격적 패배를 감추기 위한 게 아닐까? 원상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집념. 왠지 이글이글 타오르는 조조의 눈빛을 본 것 같은 기분이다.


 원상의 죽음은 결국, 원소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최종 관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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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베리알 2014.09.23 15:38 신고

    역사서를 볼 때 이런 게 참 재미있는 경우인 것 같습니다.
    본기와 열전 또 다른 열전들의 내용이 서로 묘하게 혹은 대놓고 어긋나는 경우...
    태생적으로 여러 문제점과 오류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고전이라지만 암튼 재미지니 말입니다.

    이 부분만 해도 확실히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때리던 과정이 순탄했으면 그대로 나갔지,
    굳이 다른 수를 쓰거나 뒤로 물러나지 않았을 테고... 뭣보다, 저 갑툭튀로 내린 영이라는 녀석이
    진짜 확인사살이 아닐지 원패밀리 압박 중에 사소한 방해가 있을 정도였다면 굳이 저런
    무시무시한(!) 내용을 등장시키지는 않았다고 봐야 하는 게 상식이니 말입니다. 여태까지
    안 하던 짓 그것도 저런 큰 경고를 갑자기 저렇게 한다는 게... ^^;;;

    • BlogIcon 즈라더 2014.09.24 10:43 신고

      결국, 이런 경우는 다른 사료와 비교해서 사실을 알아내야 하지요.
      비슷한 예로 노성 전투가 있겠습니다.
      사마의 열전에선 사마의가 제갈량을 털어버렸다는 전투지만, 사실 제갈량이 사마의를 털어버린 전투였어요.

  2. BlogIcon HSI 2014.09.23 15:46 신고

    오래전에 삼국지 밤새며 읽었는데ㅈ흥미롭네요 잘보고갑니다^^

  3. smkrainbow 2014.09.23 22:54 신고

    정말 조조다운 모습이네요. 어찌보면 현실적인 인간상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조조 아닐까 생각됩니다.

  4. BlogIcon 손님 2014.09.24 03:56 신고

    영웅도 열등감이라 웬지 인간미가 느껴지네요

    그러고 보면 원소도 조조의 그런 점을
    알고는 있었을 텐데 왜 조조를 그냥 두었을까요

    위협이 안된다 생각 한것인지 ...

  5. BlogIcon RGM-79 2014.09.24 15:15 신고

    원래 기전체는 여기저기 나뉘서 까고 핧고 합니다.
    사기만해도 가의같은 경우는 굴원가생열전에서는 비운의 문학청년으로 그리지만
    일자열전에 보면 그리 뒈져도 쌌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돈을 받고 내용을 바꾼 위서(아예 더러운 사서란 평을 받는)같은 경우 아니면
    눈치봐야할 사람이 많은 경우 여기저기 분산시켜 놓습니다.

    더욱이 진수시절이면 아주 먼 시대가 아니니 안그래도 눈치가 보이죠.

    • BlogIcon 즈라더 2014.09.25 15:52 신고

      그래서 더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읽다 보면 '어랏?'하게 되는 기록들이 여럿 있어서요.
      그거 짜맞추는 것도 역사학의 재미가 아닌가 싶어요.

  6. 죠죠 2015.10.08 07:38 신고

    그러고보니 보통 대중매체에서는 원소가 조조에게 열폭하는식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조조가 원소에게 열등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하더라구요

  7. 흐음 2016.01.16 21:14 신고

    조조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했기에 알게 모르게 질시와 무시 비난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조조가 조참의 후예라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라 봅니다.
    그의 사촌들이 하후씨고 조조의 조부는 조등으로 환관이었으니까요.
    그의 아버지가 이민족 출신으로 조등의 양자라는 설이 있지요.
    자신의 내력을 윤색하기 위해 조조가 조참의 족보를, 사촌들인 하후씨들은 하후영의 족보를 샀을거라 생각되네요.
    이런 집안 내력때문에 조조가 원소휘하에 있을 당시 당했을 무시와 설움이 적지 않았을거라 짐작이 갑니다.
    환관에 이민족 출신의 집안내력이니까요.
    혈연과 인맥이 굉장히 중시되던 한나라에서 조조가 원소를 이기기란 쉬운일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원소는 패하더라도 인맥과 가문의 명망을 통해 사람과 재물을 모으기 쉬웠지만 조조는 한번 한번의 패배가 뼈와 살을 발라내는 고통과 같았을테니까요.
    그럼에도 조조는 단지 열등감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반성할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원소처럼 자존심과 아집에 빠지는 대신 잘못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갈수 있었죠.
    사람의 귀히 여겼고 적재적소 썼으며 잘못을 했을때는 솔직담백하게 웃으며 인정할줄 알았던 인물이었죠.
    서주대학살을 그의 실책이라 평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외적으로 무시와 핍박을 많이 받는 이들은 대개 자신의 혈족을 몹시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버팀목이었던 아버지와 일가식솔들이 떼몰살당했는데 눈이 안 뒤집히는게 이상한거죠.
    이건 조조만의 일이 아니라 고금 동서막론하고 위대한 왕이나 황제들이 행했던 일입니다.
    딱히 조조만 꼬집어 흠을 잡는건 역시 그의 출신내력이 작용한 탓이 크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