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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전 작업이 철저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사전 작업이 허술했다간 극 전체에 몰입할 수 없게 되는 그런 드라마. <취영롱>이 그 중의 하나인데, <취영롱>이 처한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던 모양이다. 타임슬립과 역사왜곡을 금지해버린 중국의 검열 때문에 이야기의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했던 게 크다. <취영롱>에서 사전 작업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최소 10회 정도는 공을 들여야 재미있을 수 있으나 그럴 처지가 못 되었고, 그래서 제작진은 <취영롱>의 프롤로그를 하이라이트에 가깝도록 축약해서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취영롱>의 약점은 여기서 비롯된다. 지나치게 급한 전개 탓에 제대로 표현하지 못 한 인간 관계는 10화부터 시작되는 '진짜 이야기'의 전반에 걸쳐 서술되는 사랑 요소를 흐릿하게 했고 덕분에 원릉은 <취영롱>의 가짜 주인공 신세를 면치 못 하게 되었다.


 '작가가 서브 남주에 닥빙'이라는 표현이 있다. 메인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서브 남자 주인공에 꽂혀서 그쪽 이야기를 더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꼴을 비아냥거리는 표현이다. 물론, 이 경우는 작가나 감독이 서브 남주인 원잠(서해교 분)에 꽂혔다기보다 중국 정부의 검열 때문에 어쩔 도리 없이 그렇게 된 모양새. 애초에 원잠은 프롤로그에서 서늘한 악당으로 표현된 인물이라 존재 자체가 서스펜스인 터, 여러모로 득을 볼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 정도가 지나치게 느껴진다. 그렇게 지워져가는 남자 주인공 원릉(진위정 분)을 살려준답시고 원잠에게 갑작스레 악랄함을 주입하려다가 서해교가 불만을 터트리면서 시청률이 폭락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취영롱>은 대단히 설명지향이다. 유연하게, 은유로서 설정을 이해시키는 게 아니라 대사 혹은 독백으로 장편의 설명문을 읊는다. 그럼에도 구전영롱진과 영롱사에 대한 적절한 서술에 실패했다는 점을 보아 감독이나 각본가의 고민이 다소 부족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이러한 단점을 주지한 상태에서 극의 전개 방식만 두고 보자면, '음, 볼 만한 걸?'이 된다.



 <취영롱>은 경천이 구전영롱진을 사용하는 시점까지의 프롤로그를 떡밥 삼아서 작품 전체를 반전의 대상으로 삼는 드라마다. 캐스팅마저도 주로 악역으로 활약하는 배우들을 데려다가 '자, 이 등장인물이 선역인지 악역인지 맞춰보세요'라는 문제를 낸다. 프롤로그에서 악역으로 컨펌한 인물들이라 평행세계에서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게 되는 영리한 전개 방식. 자동으로 입체성이 부여되는 셈인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어차피 평행세계니까 마음대로 해보겠다'는 것마냥 세계를 뒤엎었다. 


 이미 인기를 누린 바 있는 여러 작품의 설정과 전개를 뒤섞은 것도 나름 유효하다. <취영롱>엔 류시시를 스타덤에 올린 <보보경심>은 물론이거니와 안젤라베이비의 <고방부자상>의 흔적이 엿보이며, 장르 또한 무협과 선협, 시대극에 타임슬립까지 뒤섞은 진정한 퓨전혼종이다. 극의 완성도와 별개로 이런 여러 인기 요소로 나름대로 유효타를 만들어낸 덕분에 흥미진진한 사건이 연달아 발생한다. 게다가 고구마가 될 수밖에 없는 시점엔 주인공인 경천에게 데우스 엑스마키나가 강림하셔서 풀어주니 나름 개운하다. 타임루프가 될 가능성을 꾸준히 제기해서 마지막회까지 긴장감을 가져간 것도 굉장히 흥미롭다. 중구난방에 혼란스런 완성도와 별개로, 드라마를 끝까지 보게 하는 힘 만큼은 분명히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구조상 단점일 수 있는 서브 남자 주인공의 강력한 에너지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극을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이다. 이미 절대 악역으로 등장했던 인물이 다른 차원에선 로맨틱하고 합리적이며 아주 뛰어난 행정력 지닌 군주상을 지녔을 때 느껴지는 갭. 그리고 이를 잘 표현한 서해교의 연기는 취향의 영역에 있을 재미마저 망가트리진 않았다. 


 <취영롱>은 마치 패스트 푸드 같다. 맛있게 먹고 나서 후회하지만, 언젠가 다시 찾게 되는 그런 음식. 제작진이나 배우들이 그런 작품이 되길 바랐는진 몰라도 어쨌든 흥미롭게 지켜볼 만하다.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6화까지 버티는 데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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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베리알 2018.06.21 10:13 신고

    헐 역시 중국... 아예 특정 드라마 내용의 금지가 가능한 세계관이군요. -.-;;;

    그나저나... 프롤로그가 그렇게 길면 제가 몰입하기는 힘들겠군요.
    게다가, 설명지향... 젊을 때는 안 그랬는데 나이 먹을수록 이게 산맥급으로 쑥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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