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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2017년작 <서바이벌 패밀리>. 개인적으로 이 양반이 다루는 인간사를 실제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양념 적절히 버무린 삼삼한 영화에 있어 그 인간 관계가 필요하다는 건 인정한다. 다소 얼얼했던 <워터 보이즈>의 기억 때문에 지녔던 편견은 <우드잡>으로 깨졌고, 덕분에 '어쩌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다음은 이 양반일지도 몰라'란 환상을 지니게 됐었다. 그가 다루는 인간은 비록 만화 같을지라도, 깊이가 부족하더라도, 영화 자체엔 완벽하게 어울리니까 그 정도 포장은 인정해줘야 하는 것 아니겠느냔 거다. <서바이벌 패밀리>를 통해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2.

사상 최대, 최악의 블랙아웃으로 전기를 쓸 수 없게 되자, 위험해진 도시를 떠나 시골로, 혹은 인간의 원류로 돌아간다는 이야기. <서바이벌 패밀리>는 이런 간략한 정리만으로도 전체 그림이 완성되어버리는 익숙한 설정이다. 일본에서 이런 설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식겁할 만큼 감정적인 교훈을 기겁할 만큼 매섭게 강제주입할 게 뻔하다. 2000년대 독립영화의 전성시대가 끝난 뒤, 일본은 교훈성 영화들이야말로 일본이 축구하는 진정한 방향성이라 생각이라도 한 듯,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서 비슷한 쓰레기들을 쏟아냈다. 그럼에도 <서바이벌 패밀리>를 본 이유는 야구치 시노부 감독이 마찬가지로 '익숙한 설정'이었던 <우드잡>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후카츠 에리의 열혈팬이란 사실은 안비밀.)



3.

<서바이벌 패밀리>가 지향하는 건 단순히 '전기를 소중히 여깁시다!'와 같은 공익 캠페인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 한 서스펜스다. 전기가 없는 상황에서 집단 공황을 일으켜 언제 서로 잡아먹을지 모르는 끔찍한 현실이 마치 코 앞에 온 듯 아닌 듯 줄타기를 한다. 물론, 이런 유형의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만들 리가 없지만, 적어도 야구치 시노부는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은 채 영화를 만든 모양이다. 이를 위해서 '블랙아웃'이 아니라 'EMP 폭탄이 떨어진 세상'이 알맞은 것 아닐까 싶은 극단적 설정을 취한 모양이고, 영화는 117분 동안 감상자를 서스펜스의 세상에 초대한다. 이토록 영리한 선택을 무색하게하는 야구치 시노부의 연출이 아쉽지만 그의 스탠스가 마음에 드는 건 사실이다. 일단, 스필버그 감독에게 가서 서스펜스를 좀 배워서...



4.

야구치 시노부 감독이 여러모로 장르를 비틀어보려 노력한 흔적은 꽤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흔적은 역시 OST를 배제한 연출이다. 영화는 특수한 순간을 제외하면 OST를 담지 않았다. 환경 소음, 대사 등으로 이루어진 영화의 음향은 분명히 시놉시스만 보고 예상한 그런 유형의 영화와 꽤나 궤를 달리한다. "전기가 끊겨버린 세상에 OST가 흐른다고? 무슨 개소리야!"란 일갈이 느껴진다. 덕분에 <서바이벌 패밀리>는 <우드잡>과도 약간 결을 달리하게 되었고, 야구치 시노부의 스타일이 익숙한 사람도 꽤 신선함을 맛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교훈에 죽고 교훈에 사는 일본식 서사가 담기지 않은 건 아니다. 그저 이 정도로 담백하면 괜찮지 않나 싶을 뿐. 게다가 뜻밖에도 영화 속 가족은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어떠한 감정을 느꼈는지 직접 언급하는 걸 꺼린다. 온갖 소회를 다 풀어내고 가족애를 뿜어내야 하는 순간도 담담할 뿐이다. 야구치 시노부가 '모호함'을 어떻게 써먹는지 알아버렸다.



5.

꼭 봐야 하는 영화라 말할 순 없지만, 필모그래피가 재미있는 작품으로 가득 찬 어느 감독이 한계를 깨부수려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물이라 말할 순 있다. 사실, 조금 많이 늦은 편이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초창기부터 한계를 깨부수고 호불호의 영역에 올라선 걸 보면 더더욱. 영화계가 몰락했는데 인정도 안 하고, 생각도 안 하고, 반성도 안 하는 일본 영화계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같은 감독이 한 사람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아직 멀고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하는 이 양반을 괜히(!) 끄집어내봤다.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만의 작가주의엔 매력이 있다.



6.

후카츠 에리 ♡



 이하 스크린샷은 <서바이벌 패밀리> 일본판 블루레이 원본 사이즈 캡쳐. 누르면 커진다. 일본영화의 일본판 블루레이가 항상 그런 것처럼 아주 뛰어난 화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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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베리알 2018.08.05 22:07 신고

    그러고보니 그렇군요.
    전기가 없는 시대를 그리는데 OST의 존재가... ^^;;;
    너무 일상적으로 안정적인 전기가 공급되어서 그렇지
    잠깐만 정전이 되어도 일상이 유지가 안 되는 세상에서...

    블루레이 화질은 스샷만 봐도 와~할 정도로 좋군요.
    DVD 시절 생각하면, 일본 영화의 블루레이 화질은 정말 놀랍습니다.
    하긴, 화질로 유명했던(?) 한국 영화의 나라에서 이런 얘길 한다는 게 우스울지도... ^^;;;

    • BlogIcon 즈라더 2018.08.07 16:12 신고

      덕분에 영화가 굉장히 차분해졌어요. 더 집중하게 되는 장점도 생겼고요.

      확실히 한국이나 일본이나 레퍼런스급 화질이라고 해봐야
      어두운 장면에선 여지없이 디테일 떡이 되는 등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는데..

      디지털 시대의 득을 여러모로 많이 보는 것 같스니다.

  2. BlogIcon 홍준호 2018.08.07 00:11 신고

    올 해 극장 말고 바로 VOD로 가서 아쉽더군요. 올 해 본 가장 좋은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야구치 시노부 작품답지 않게 상당히 정적이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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